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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 성인지 감수성 판결 보편화 됐지만…여전한 ‘성적 수치심’의 벽 [수치스러운 피해자는 없다①]
미투운동 이후 판결문에 ‘성인지 감수성’ 등장
해마다 형사판결에 100여건씩 누적… 자리잡아
“인식 변화 긍정적으로 이뤄져” 법조계 전반 평가
그럼에도 피해자에 피해자다움 관성적 요구 지적
수사·재판에서 여전히 쓰이는 ‘성적수치심’ 때문
“가해자 중심 표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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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치’라는 단어의 표준국어대사전 정의가 적힌 이미지. ChatGPT를 활용해 생성. |
[헤럴드경제=안대용·안세연·양근혁 기자] 2018년 한국사회를 뒤흔들었던 ‘미투운동’은 성폭력과 성범죄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을 바꿔놓았다. ‘왜 곧바로 신고하지 않았나’, ‘왜 그렇게 입었나’, ‘왜 주눅들지 않나’ 등등 성폭력·성범죄 피해자를 탓하듯이 오랜 시간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던 분위기가 실재했지만, 미투운동 확산 이후 피해자의 호소를 경청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렸다. 이 같은 변화는 법원 판결에도 영향을 미쳤고 법원 판결이 다시 사회적 인식 변화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2018년 4월 대법원이 성폭력 관련 사건을 심리할 때 가급적 피해자가 처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고 피해자의 2차 피해 가능성을 유념해야 한다고 판결을 통해 밝힌 이후 법원에선 ‘성인지 감수성’을 강조하는 판결을 잇따라 내놨다. 성인지 감수성은 성별 간 불균형 상황을 인식해 그 안에서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해내는 민감성을 뜻하는데 미투운동의 촉발과 확산을 통해 발산된 목소리가 법원 판결에 반영되고 축적된 것으로 평가됐다. 성폭력과 성범죄가 피해자 개인의 수치로 여겨질 일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하면서, 가해자의 범죄이자 구조적 폭력을 동반한 사회 문제로 인식의 축이 옮겨 가는 데 있어 법원이 성인지 감수성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그에 따른 판단을 내놓은 것이 분명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수사와 재판 단계마다 여전히 성폭력·성범죄 피해자의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성폭력처벌법 등 현행 법률 조문에 고스란히 포함돼 있고, 판례상 형법의 강제추행죄 성립요건으로 녹아 있는 ‘성적 수치심’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수치’를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 또는 그런 일’로 정의한다. 그런데 ‘성적 수치심’이라는 용어 자체는 물론이고 법적 요건화 돼 있는 상황은 아무 잘못 없는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강요하는 것처럼 작용하고 있고 피해자다움을 요구하고 있다.
21일 법원의 종합 사법정보 서비스 플랫폼인 사법정보공개포털에서 확인한 결과 2018년 이후 지난해까지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용어가 쓰인 형사 판결은 총 1094건이었다. 사법정보공개포털의 판결문 열람 시스템은 하나의 사안이어도 심급별 판단에 따라 개별 판결로 사건수가 셈이 된다. 예를 들어 피고인 A씨의 형사재판 1·2·3심에서 각각 ‘성인지 감수성’이란 용어가 사용된 경우 ‘성인지 감수성’이 쓰인 판결은 3건이다.
‘성인지 감수성’이 법원 판결문에 쓰인 첫 해였던 2018년 성인지 감수성을 언급한 판결은 25건이었다. 이듬해 2019년 179건으로 늘었고 2020년 152건, 2021년 178건, 2022년 192건, 2023년 174건, 2024년 118건으로 집계됐다. 지난해의 경우 76건으로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적게 나타났는데, 현재 4월이어서 해를 넘겨 2026년에도 심리가 진행 중인 사건 중 판결이 확정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사법정보공개포털에선 판결이 확정돼야 최종 심급뿐만 아니라 그에 앞선 하급심 판결문도 열람이 가능하다. 해마다 소폭 증감은 있지만 2018년 이후 성인지 감수성을 판결문에서 강조한 사안이 꾸준히 누적되고 있다는 것이 통계로 나타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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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앞 로비. [헤럴드경제DB] |
성인지 감수성은 성폭력·성범죄 사건에 대한 유무죄 여부, 양형을 다투는 형사사건에서 주로 언급되지만 정작 이 용어는 형사 판결이 아닌 행정 사건에서 가장 먼저 쓰였다.
2018년 4월 당시 대법원 특별2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제자들을 성희롱한 대학교수의 해임 취소 소송 사건에서 “법원이 성폭력 등 관련 소송 심리를 할 때 사건이 발생한 맥락과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밝혔다. 이후 미투운동 확산과 함께 성인지 감수성을 중시하는 법원 판결이 늘어나며 새로운 판결 경향으로 주목받았고,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비서 성폭행 사건 등을 통해 법조계 안팎으로 널리 환기됐다.
법조계에선 미투운동 이후 성인지 감수성을 강조하는 판결이 지속적으로 늘고 있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단순히 ‘판결이 많아졌다’는 차원을 넘어 성폭력·성범죄 사건을 바라보는 법조계의 인식 자체가 바뀌었다는 분석이다.
허윤정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은 “이전에는 피해자를 대리하는 변호사들이 의견서를 내거나 법정에 출석했을 때 개념부터 하나 하나 설명해야 했는데 요즘은 성인지 감수성을 언급만 해도 재판부나 당사자들이 다 이해를 하니 보편화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식 변화가 긍정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성폭력·성범죄 사건 수사에 정통한 현직 검찰 간부도 “성인지 감수성 판결이 쌓이면서 성폭력·성범죄 사건을 바라보는 인식의 기준점이 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성인지 감수성을 강조한 판결이 보편화되면서 성폭력·성범죄 피해자의 목소리를 대하는 전반적 태도가 과거와 달라진 것으로 평가되지만, 여전히 수사와 재판 실무에서 관성적으로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흔히 쓰이는 ‘성적 수치심’ 때문이다. 피해자가 느끼는 피해감정은 화남, 황당함, 억울함 등 다양한데 수치라는 감정을 바탕으로 한 ‘성적 수치심’이 법적 요건으로 적용되고 있다 보니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이를 묻고 확인하는 일이 반복되는 상황이다.
사법정보공개포털에 따르면 2018년 이후 ‘성적 수치심’이라는 표현이 쓰인 형사 판결은 2024년까지 해마다 6000~7000건대를 나타냈다. 2018년 6869건, 2019년 6654건, 2020년 6728건, 2021년 6789건, 2022년 7220건, 2023년 7698건, 2024년 7200건으로 집계됐다. 지난해의 경우 아직 사건 자체가 확정되지 않아 하급심 판결이 열람되지 않는 점 등으로 인해 5757건으로 나타났다.
성폭력·성범죄 사건 피해자 대리 경험이 많은 이은의 변호사는 “수치심이란 말 안에는 내가 부끄러운 것, 남에게 알려졌을 때 민망한 것이란 의미가 있고 어떻게 보면 피해자 입장에서 되게 수동적이기도 한 것”이라며 “그런 감정을 가질만한 상황이어야 한다는 가해자 중심의 엄격한 요구인 면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성폭력과 성범죄에 대한 접근 시각의 전환이 필요한데 그 부분에 있어서 여전히 사법이 가해자 중심의 표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안대용 기자 dandy@heraldcorp.com
안세연 기자 notstrong@heraldcorp.com
양근혁 기자 yg@heraldcorp.com
출처 https://n.news.naver.com/article/016/0002632778?type=journalists 2026.04.24